함께 모여 말씀 앞에 서는 시간
매주 일요일 오전 9:00
본당
장년 주일예배
매주 일요일 오전 11:00
올땅
장년 주일예배
매주 일요일 오전 11:00
본당
유아~중고등부
지난 설교를 다시 들어보세요
8건의 설교
2026년 4월 19일, 설교자는 로마서 2장 1-16절을 본문으로 "심판주"라는 제목의 주일 설교를 전했다. 설교는 현대인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심판'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누가 심판주이신지, 왜 인간은 심판의 자리를 탐내는지,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로마서 2장의 흐름을 따라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고발한 뒤, 2장에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대인들을 향해 손가락을 돌린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아, 그대가 누구이든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종교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면서도 스스로 심판관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바울은 직접적으로 경고한다. 심판·진노·정죄라는 단어는 감성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
로마서 2장 16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그날"을 말한다. 바울은 심판의 집행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선포하며, 설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선언한다. 도예가가 자신의 도자기의 균열을 누구보다 잘 알듯,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의 취약점을 꿰뚫듯,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16절의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창조주이신 예수님뿐이며, 그분의 심판이 진리에 맞다(2절)는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공정하게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은 주님 오시기 800년 전에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질병 때문에 상하였다"고 예언했고, 그 말씀은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역사상 판사가 피고의 죗값을 대신 치른 경우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그 일을 담당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차갑고 냉정한 법정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담긴 역설의 자리다. 스스로 죗값을 치르셨기에 그분의 용서는 진정한 용서이고, 그분의 정죄는 온전히 정당하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예수님께 있으며,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주셨다"고 직접 말씀하신다. 심판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에게 위임하신 고유한 권한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다면 심판의 주님 되심 또한 받아들여야 하며, 그 두 권세는 하나로 묶여 있다.
---
인간이 심판의 자리에 앉으려는 경향은 단순한 교만이나 실수가 아니라, 창세기 3장과 직결된 가장 뿌리 깊은 죄성이다. 에덴에서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유혹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한, 즉 심판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원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인간이 차지하려 한 것이며, 그 죄성은 지금도 계속 작동한다.
인간 판사는 피고의 내면과 동기를 알 수 없고 증거로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세상 법정은 1심·2심·대법원을 거쳐도 억울한 자가 나오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자가 생긴다. 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모든 은밀한 것이 드러나고 동기까지 심판받는다. 11절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처벌하지 않으신다. 분별(행동을 평가하는 것)과 심판(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야고보서 4장 12절은 "입법자와 재판장은 오직 한 분"임을 선언한다.
---
고린도후서 5장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두려운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밝히 드러나는 자리다. 은밀한 것까지 아시는 그분 앞에서 숨기려 하지 않고 삶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곧 회개다. 4절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어주고 있음을 모르십니까?"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지금 심판을 유예하고 오래 참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돌이킬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향한 정죄나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에덴의 유혹은 지금도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것과 내가 심판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구속주이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의미 있듯, 심판이 있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다. 16절의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라는 표현은 심판의 소식이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다. 심판의 권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모두 예수님께 있다. 오늘 우리는 심판받을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지도록 초청받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은혜다.
2026년 4월 19일, 설교자는 로마서 2장 1-16절을 본문으로 "심판주"라는 제목의 주일 설교를 전했다. 설교는 현대인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심판'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누가 심판주이신지, 왜 인간은 심판의 자리를 탐내는지,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로마서 2장의 흐름을 따라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고발한 뒤, 2장에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대인들을 향해 손가락을 돌린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아, 그대가 누구이든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종교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면서도 스스로 심판관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바울은 직접적으로 경고한다. 심판·진노·정죄라는 단어는 감성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
로마서 2장 16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그날"을 말한다. 바울은 심판의 집행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선포하며, 설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선언한다. 도예가가 자신의 도자기의 균열을 누구보다 잘 알듯,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의 취약점을 꿰뚫듯,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16절의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창조주이신 예수님뿐이며, 그분의 심판이 진리에 맞다(2절)는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공정하게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은 주님 오시기 800년 전에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질병 때문에 상하였다"고 예언했고, 그 말씀은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역사상 판사가 피고의 죗값을 대신 치른 경우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그 일을 담당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차갑고 냉정한 법정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담긴 역설의 자리다. 스스로 죗값을 치르셨기에 그분의 용서는 진정한 용서이고, 그분의 정죄는 온전히 정당하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예수님께 있으며,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주셨다"고 직접 말씀하신다. 심판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에게 위임하신 고유한 권한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다면 심판의 주님 되심 또한 받아들여야 하며, 그 두 권세는 하나로 묶여 있다.
---
인간이 심판의 자리에 앉으려는 경향은 단순한 교만이나 실수가 아니라, 창세기 3장과 직결된 가장 뿌리 깊은 죄성이다. 에덴에서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유혹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한, 즉 심판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원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인간이 차지하려 한 것이며, 그 죄성은 지금도 계속 작동한다.
인간 판사는 피고의 내면과 동기를 알 수 없고 증거로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세상 법정은 1심·2심·대법원을 거쳐도 억울한 자가 나오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자가 생긴다. 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모든 은밀한 것이 드러나고 동기까지 심판받는다. 11절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처벌하지 않으신다. 분별(행동을 평가하는 것)과 심판(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야고보서 4장 12절은 "입법자와 재판장은 오직 한 분"임을 선언한다.
---
고린도후서 5장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두려운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밝히 드러나는 자리다. 은밀한 것까지 아시는 그분 앞에서 숨기려 하지 않고 삶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곧 회개다. 4절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어주고 있음을 모르십니까?"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지금 심판을 유예하고 오래 참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돌이킬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향한 정죄나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에덴의 유혹은 지금도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것과 내가 심판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구속주이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의미 있듯, 심판이 있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다. 16절의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라는 표현은 심판의 소식이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다. 심판의 권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모두 예수님께 있다. 오늘 우리는 심판받을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지도록 초청받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은혜다.
2026년 4월 5일 주일예배에서 마태복음 28장 11~1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전해졌다.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직후 로마 군사들과 대제사장들 사이에 이루어진 은밀한 거래를 중심으로, 부활의 역사적 신빙성을 다각도로 논증하였다.
---
마태복음 28장 11~15절은 부활 직후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사들이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나 총독이 아닌 유대 대제사장들에게 먼저 달려가 보고한 사건을 기록한다. 이는 로마 군사들이 이미 예수님의 부활 예언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부활 당시 지진이 발생하고 천사가 나타나 군사들이 기절하였으며, 정신을 차려 보니 무덤 문이 열리고 시신이 없어진 상태였다.
구약 성경에 메시아 부활 예언이 있었기에 대제사장들은 이 사태의 의미를 즉각 파악하였다. 그러나 회개 대신 그들은 장로들과 의논하여 군사들에게 거액을 주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부활 반박 논리인 '시신 도난설'의 시작이다. 또한 로마법상 근무 중 수면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 대제사장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어 군사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
이 거짓 주장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다. 잠들어 있었다면 누가 시신을 가져갔는지 목격할 수 없으므로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진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로마 군사들은 단도·장검·창·흉배 등으로 중무장한 정예 병력이었으며, 이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특수 훈련도 받지 않은 제자들이 회칠로 봉인된 수 톤짜리 연자맷돌 문을 소리 없이 굴려 시신을 탈취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거짓말의 존재 자체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
현대 역사학자들(기독교계 외부 포함)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 가설 | 핵심 주장 | 모순 |
|------|-----------|------|
| 환상설 | 제자들이 간절히 원해 집단 환상을 봄 | 500명 이상이 서로 다른 장소·시간에 동일한 환상을 보는 것은 불가능 |
| 시신 도난설 |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 부활을 조작 | 중무장 로마 군사 돌파 및 봉인된 수 톤짜리 문 개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거짓을 위한 순교도 논리적으로 불가 |
| 기절설 |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무덤 안에서 깨어남 | 중상을 입은 몸으로 내부에서 수 톤짜리 문을 열고 중무장 로마 군사를 제압하는 것은 가능성 제로 |
---
역사학은 과거 사건을 100% 재현할 수 없으나, 가장 설득력 높은 가설을 채택한다. 빈 무덤, 제자들의 변화와 순교, 적대자들의 회심 등 모든 역사적 데이터는 단 하나의 원인, 즉 예수님의 부활로만 완벽하게 설명된다. 영국·미국·독일과 같이 논리를 중시하는 나라의 법원에 이 증거들을 제출한다면 부활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설교자의 결론이다. 부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가장 큰 장벽은 역사적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느냐"는 인간적 선입견임을 강조하며 설교를 마무리하였다.
2026년 3월 29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는 로마서 1장 18~23절을 본문으로 "디지털 바벨탑과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설교는 2024년 10월 발표된 초파리 뇌 커넥톰 완성 뉴스를 출발점으로 삼아, 첨단 과학 기술 시대에 반복되는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을 조명했다.
---
2024년 10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이 주도한 국제 컨소시엄 플라이와이어(FlyWire)는 초파리 뇌의 완전한 신경 연결 지도(커넥톰)를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전 세계 146개 연구기관, 약 670명의 과학자가 7년 가까이 연구하고 AI의 도움으로 완성한 이 지도에는 13만 9,255개의 뉴런과 5,450만 개의 시냅스 연결이 빠짐없이 담겼다. 이후 버클리 대학 연구팀은 이 지도를 토대로 초파리 뇌 전체를 노트북 컴퓨터에서 시뮬레이션하는 데 성공했으며, 냄새 반응·번식 행동 등 초파리의 모든 생리적 반응을 재현했다.
이에 고무된 스타트업 이온 시스템(Ion System)은 세계 최고 수준의 뇌 에뮬레이션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인간 뇌의 완전한 디지털 에뮬레이션을 달성하겠다고 공식 선포했다. 이는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이식하여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목표, 즉 "육신은 죽어도 디지털로 영원히 산다"는 개념이다.
---
인간의 뇌에는 860억 개의 뉴런과 100조 개의 시냅스가 존재하며, 이는 초파리 뇌보다 100만 배 이상 복잡하다. 과학자들 스스로 현재 지구상의 모든 하드웨어 저장 장치를 동원해도 인간 뇌의 완전한 디지털화는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연구는 멈추지 않는다. 컴퓨터 발전 속도를 자동차에 비유하면, 최신 벤츠 모델이 1만 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로 기술이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
로마서 1:19~20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물을 통해 드러났으므로 인간은 핑계 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초파리의 작은 뇌 속 수천만 개의 정교한 연결망을 발견했을 때, 과학자들이 진정으로 느껴야 했던 것은 "이토록 정교한 설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위대한 설계자가 계시다"는 경외감이다.
로마서 1:21~22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 마음이 어두워졌으며, 스스로 지혜 있다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창세기 3장의 유혹 —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 — 이 오늘날 AI 연구소와 데이터 센터 안에서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고대인이 나무와 돌로 신을 만들었다면, 현대인은 반도체와 알고리즘으로 신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
설교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아이러니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로마서 1:18의 하나님의 진노는 냉혹한 심판관의 분노가 아니라, 절벽 끝으로 달려가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절박한 심정이다. 자연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구원의 방법은 알려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로마서 3:21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 가 그 답이다. 아무리 뇌를 디지털화해도 죄와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구원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설교는 성도들에게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성경의 특별 계시를 통해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깊이 알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관계를 맺고 복음을 증거할 것을 촉구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나는 최첨단 기술과 돈이라는 현대적 우상 앞에서 또 다른 고사를 지내고 있지는 않은가? 내 지식과 능력으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디지털 바벨탑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 슈퍼컴퓨터보다 정교한 인간의 뇌를 만드시고 그 속에 당신의 형상을 심어주신 창조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삶이 성도의 마땅한 응답임을 강조하며 설교를 마쳤다.
2026년 3월 22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가 전한 설교로, 제목은 제주도 방언 "살민 살아지코" — "살다 보면 사라지나요?" — 이다. 본문은 로마서 1장 16~17절이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 "살민 사라진다"를 도입부로 삼아 고난 속 신자의 버팀의 근거를 탐구한다.
---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딸 애순에게 남긴 유언 "살민 사라진다"는 제주도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삶의 철학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 "시간이 약이다"와 같은 맥락으로, 답이 보이지 않는 고난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그저 버티는 것이라는 세상의 공식을 대변한다. 설교자는 여기서 핵심 질문을 던진다: 믿는 사람도 세상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가?
---
로마서 1장 17절 —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 을 해석하면서, 설교자는 세상적 의인(도덕적 완벽함)과 성경적 의인을 구분한다. 근거 본문은 창세기 15장 6절이다.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시점은 삶이 완벽할 때가 아니었다 —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등 실수가 있었고, 이삭을 바치는 최후의 시험 훨씬 이전이었다. 성경의 의인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이다. 따라서 신자가 고난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자신의 참을성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하신 관계와 정체성이다.
---
로마서 1장 17절이 인용하는 구약 본문은 하박국 2장 4절이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따져 물을 때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 바로 이 구절이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의 원초적 의미는 지적 동의나 신념이 아니라 "버티고 견디고 자리를 지키다"이다. 이를 보여주는 예시가 출애굽기 17장의 아말렉 전투다 —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돌로 받쳐 하루 종일 올려놓은 그 상태, 팔이 내려오지 않고 버티는 상태가 에무나다.
따라서 하박국서의 직역은 이렇게 된다:
> "의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버팀으로 살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 믿음)로 옮긴 이유는, 단순히 견디는 행동을 넘어 그 견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 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
① 방향이 있는 버팀
세상 사람은 막연히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며 버티지만, 신자의 버팀에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다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보좌. "폭풍우 속에 맨땅에서 비를 맞으면 진흙이 되어 무너지지만,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서는 같은 비를 맞아도 요동하지 않는다."
② 내 힘이 아닌 은혜의 결과
버팀의 근거는 의지력이나 인내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미각(단맛·짠맛)과 후각을 동시에 잃는 희귀한 증상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라는 데까지 갔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놀랍게 사용하셨다고 고백한다. "오늘 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것은 나의 인내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믿음의 에너지였다."
③ 현재 진행형 믿음
믿음은 과거의 고백으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삶의 무게를 지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 사방이 막힌 현실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 —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또한 인디언 악수의 비유처럼,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이 붙잡고 계신다 —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손이 나를 붙들고 있다.
---
설교자는 고난 속에서 "살민 사라지고"라고 자문하며 눈물 흘리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 "네가 지금 버티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믿음의 자리다. 네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의 신실함, 에무나가 너를 붙들고 있다."
막연한 현실 앞에서 억지로 웃으려 하지 말고, 울면서라도 기도하고 힘들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오늘 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를 지킬 것을 권면한다. 버티는 것이 곧 가장 고귀한 믿음이며, "의인은 에무나(버팀)으로 살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그냥 버티는 인생을 넘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축복하며 설교를 마친다.
2026년 3월 15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가 요한복음 2장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본문을 중심으로 "부족과 복음"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핵심 질문은 "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 포도주 부족이라는 결핍의 현실이었는가"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부족함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탐구했다.
---
설교자는 오랫동안 인간의 부족함을 원죄와 연결된 비참한 현실, 즉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이해해 왔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관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에 대해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이는 부족과 결핍을 죄의 결과로 단정하는 시각과 다르다. 설교자의 현재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약간의 결핍이 있는 상태를 '선한 상태'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
창세기 1–2장을 분석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사명은 경작(일함)과 지킴(관리)이다.
---
설교자는 ChatGPT(카카오 플러스 구독 사용 경험 포함)를 비롯한 AI가 신학적 질문에도 깊이 있는 답변을 제공할 만큼 발전했음을 인정했다. 이런 시대에 인간을 지능이나 능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한다. 오히려 약함·모자람·상처·아파함이 인간됨의 본질이며, 교회와 복음이 다루어야 할 핵심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
예수님과 어머니의 대화 재해석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번역은 원문상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로 읽어야 한다. 이는 포도주 부족 자체가 아니라, 육신의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요청하는 관계를 묻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육신의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요청하는 것에는 내가 해줄 수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는 이 부족의 현실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뜻을 즉시 알아듣고 종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마리아의 요청이 아들에 대한 부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 드리는 기도였음을 보여준다.
유대교 결례 항아리의 상징
혼인 잔치에 놓인 돌 항아리 6개는 유대교 정결 의식의 상징, 즉 구약의 총화다. 이 항아리는 부족한 현실에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하셨을 때, 구약의 틀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어가자 비로소 의미를 가지며 변화가 일어났다. 결과물인 "좋은 포도주"의 '좋다'는 표현은 창세기 1장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동일한 단어로, 하나님의 창조적 선함이 회복됨을 의미한다.
---
기복 신앙("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은 오히려 인간을 끝없는 결핍 속에 던진다.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필요한 것은 항상 생기고, 자녀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도 만족은 없다. 자본주의·사회주의 등 어떤 시스템도 인간의 부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다(설교자는 부친 간병 경험을 통해 이를 실감했다고 밝혔다).
반면 복음은 부족함을 본연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서로의 모자람을 따뜻하게 알아주는 관계를 지향한다. 르네상스적 완벽 인간(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을 인간다움의 실체로 보는 인문학적 이상과 복음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작은 사람이 자신의 작은 것을 내놓아 함께 서는 모습이 진정한 선한 세상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실체다.
---
예수님이 첫 번째 표적으로 포도주 부족의 현실을 택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간의 약함을 함께 짊어지기 위함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자신의 모자람을 수용하고 타인의 모자람을 돕는 이로 서는 것이 오늘날 복음의 본질적 실천임을 촉구하며 설교를 마쳤다.
2026년 3월 8일, 설교자님이 로마서 1장 8-15절을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전했다. 설교 제목은 '카리스마'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 했던 목적과 '신령한 은사'의 의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때까지 로마 교회를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으나, 로마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졌음을 감사했다(8절). 그가 로마 방문을 원했던 세 가지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은사의 헬라어 원어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로,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은사는 내 노력이나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거저 주시는 영적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며, 은사는 개인의 영광이 아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명시한다.
성경에 나타난 은사는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한국 장로교 보수 교단은 오랫동안 은사 중지론을 강조해 왔다. 이는 사도 시대 이후 방언·예언·신유 같은 초자연적 은사가 멈췄다는 견해로, 성경이 완성되어 계시가 충분하다는 논거에 기반한다. 과거에는 예배 중 박수나 기타 반주조차 이단시될 만큼 분위기가 엄격했다.
그러나 현재는 은사 지속론이 상당한 힘을 얻고 있으며, 보수 교단 내에서도 30% 이상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은사가 완전히 끝났다고 명시된 구절이 없으며, 오히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권면한다. 성경이 완성되었어도 성도의 연약함은 여전하기 때문에, 성령의 강력한 도우심은 오늘날에도 필수적이다.
---
설교자는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기도 하지만, 이미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 전이(임파테이션)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은사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순종과 개발을 통해 성장한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때마다 은사는 더 구체적이고 확실해진다. 설교자는 구제의 은사와 관련한 개인 경험(허리가 굽은 노인에게 헌금을 드린 일화)을 통해, 순종 후 찾아오는 평안이 은사 개발의 증거임을 설명했다.
---
은사가 없는 신앙생활은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아서, 내리막에서는 굴러가지만 오르막에서는 한계에 부딪힌다. 반면 은사가 있는 신앙생활은 "성령의 엔진을 달고 달리는 스포츠카"와 같다. 설교자는 교회 내에 이미 곽인순 목자님의 은사를 사모하며 기도하는 목자가 있음을 언급하며, 성도들이 그를 위해 중보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핵심 권면 사항:
2026년 3월 1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는 여호수아 3장 1-5절을 본문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설교는 오늘날 기후 이상 현상(중국 100년 만의 홍수, 브라질·중동·아프리카 홍수, 미국 100여 개 토네이도 동시 발생, 일본 아오모리현 1.7m 적설 등)을 도입부로 삼아, 두려움을 주는 세상의 기이한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이한 일에 대한 말씀을 나눴다.
---
출애굽 40년 만에 요단강 동편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의 보고(여리고 주민들의 사기 저하)를 듣고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 강가로 나아갔다. 그러나 2절에 따르면 즉시 건너지 않고 사흘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 대기의 시간은 "가야 할 때와 서야 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
설교자는 인생의 선택이 단순히 재정적 손익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좌우하는 문제임을 강조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성경 사례를 제시했다.
---
5절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에서 핵심 원리가 제시된다. 히브리어 카다쉬(קָדַשׁ)—성결, 성별, 거룩한 구별—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요단강 물이 멈추어 마른 땅처럼 건넘)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를 받아들일 백성의 준비 상태가 중요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에서 예수님이 나사렛 고향에서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다"는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생각·욕심·자랑은 그 자체로 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방해하는 요소다.
레위기 11장의 음식 규정을 통해 성결의 실천적 의미를 설명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은 영양학적 이유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는 상징적 요구다. 홍수 비유를 사용하여—바닷물이 육지를 훑고 지나가면 물은 손해가 없지만 육지는 큰 손해를 입듯—믿지 않는 세상의 문화가 믿는 사람의 삶에 들어오면 영적 피해는 오직 믿는 사람에게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를 인용하며, 오늘날 성결의 핵심은 절제—세상 사람들이 다 한다고 다 하지 않는 구별된 삶—라고 정의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 "깨끗한 자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된다"는 말씀도 함께 제시했다.
---
설교자는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키 187cm, 78kg의 건강한 체육교육과 출신 아들이 신체검사에서 1급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며, 만약 면제를 받았다면 그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라 "기괴한 일"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단순한 대박이나 로또가 아님을 강조했다.
만나 세대(광야에서 태어나 구름기둥·불기둥·만나·메추라기를 일상으로 경험한 세대)에게 요단강이 멈추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와 뜻과 무관한 일을 그냥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시편 131편 1-2절에서 다윗의 고백—"기이한 일을 스스로 행하려 하지 않고,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고요하고 잠잠하게 여호와를 바라겠다"—이 성도의 모범적 태도로 제시되었다.
---
설교자는 청중에게 세 가지를 권면하며 설교를 마쳤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 다음세대를 전담하여 섬길 사역자를 보내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에 넉넉한 예배 공간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제19권 15호
2026년 4월 12일